키보드를 내려치는 이야기


 연록은 여느 때와 같이 늦은 밤, 재떨이를 벗삼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해야 할 작업이 상당히 밀려 있었기 때문에 키보드 위를 오가는 손은 바빴다. 입에 물린 담배는 대조적으로 천천히 타들어 갔지만 그래봐야 몇 초 정도 수명을 연장할 뿐이다. 시침과 분침이 교차하는 횟수가 길어지자 굳게 닫힌 창문 틈새로는 한 마리 뱀처럼 냉기가 기어 들어오고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는 식어 갔다. 방세가 좀 많이 밀리긴 했지만 이런 강경책을 쉽사리 쓸 거라곤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연록은 매우 당황스러웠다. 아무래도 오늘은 겉옷와 담배, 여자친구를 꼭 끼고 긴긴 밤을 지새워야 할 것 같았다.
 "파랑이. 자?"
 그와 그녀는 동거하고 있다. 연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리없는 의자에서 일어서 허리를 쭉 펴며 물었다.
 "아니."
 파랑의 대답은 언제나 그래왔듯이 간결했다. 원룸 안은 아직 형광등을 켜지 않았기 때문에 들어오는 빛이라곤 모니터 백라이트와 각종 가전제품들의 작동표시용 불빛 뿐이었다. 공허한 색깔의 발광체가 비겁하게 어둠 속에서 고개만을 내밀었기 때문에 파랑은 연록의 질문에 대답하며 어떤 답답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 답답함은 연록이 일어나서 불을 켜자 눈녹듯 사라졌다. 파랑은 그녀의 가슴 속에서 어떤 사랑이 부활하듯 점화된 것을 느꼈다. 연록은 창백한 형광등 불빛 아래서 파랑을 보며 상큼하게 미소지었다.
 "너는 일 다 끝났어? 계속 누워만 있으려니 힘들어."
 파랑은 귀찮아서 이불 깔고 누워만 있었던 주제에 힘들었다는 둥 헛소리를 해댔다. 그녀가 다 마신 딸기우유 팩 안에는 담배꽁초가 그득했다. 연록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파랑를 바라보다가 이불 위에 무릎 끓고 앉으며 그녀의 머리를 문질문질 쓰다듬었다.
 "대충은. 혼자 이불 안에서 따뜻하게 보냈지?"
 "일이랑 바람피운 사람한테 그런 말 듣고싶지 않네요."
 "그 일이 성공해서 돈 좀 들어오면 바람 더 피우라고 등 떠밀 거면서 ."
 연록은 몹쓸 소리를 하면서 파랑이 들어가 있는 이불 틈새를 파고들었다. 그녀가 오래도록 누워 있었던 탓인지 정말로 따뜻했다. 파랑의 긴 속눈썹과 가슴을 설레게 하는 두 눈동자를 보며 연록은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녀가 흠입했던 딸기와 니코틴의 잔향이 그의 혓바닥으로 전해졌다. 연록은 온 몸이 행복감으로 늘어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와 뜨거운 키스를 나눴다.
 "어머, 어머. 이 저질."
 "그래. 알아차리는 게 늦군!"
 "병신...... 하지만 멋있어!"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상진은 이른 저녁, 집을 나서 약속 장소로 향했다. 길가의 쓰레기통 옆엔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얼어죽어 있었다. 겨울이 불러온 잿빛의 하늘은 거리에 하얀 가루눈을 흩어놓고, 그 아름다움 대신에 조그만 동물의 목숨을 앗아갔다. 하지만 상진은 감흥 없이 담배를 꺼내 물고는 불을 당겼다. 약속 시간은 이십 분 후, 늦을 것 같으니 걸음을 좀 더 빨리 할까.
 쟌느는 남동생의 배웅을 받으며 천천히 집을 나섰다. 길가의 쓰레기통 옆엔 조그만 커피 캔이 차바퀴에 우그러져 있었다. 짓이겨진 조그만 고철 위에도 어느덧 소복한 가루눈이 쌓여 그 모습을 감추었다. 하지만 눈이 녹아 버리면 저 커피 캔은 좀더 불쌍한 피해자의 모습으로 도로 위에서 고독한 시위를 계속할 것이다. 하지만 쟌느는 감흥 없이 담배를 꺼내 물고는 불을 당겼다. 하얀 연기가 그녀의 눈을 피해 검은 반테 안경 사이로 미끄러져내렸다. 약속 시간은 이십 분 후, 늦을 것 같으니 걸음을 좀 더 빨리 할까.
 "I wish you merry cristmas. I wish you merry cristmas. I wish you......"
 "I wish you merry cristmas. I wish you merry cristmas. I wish you......"
 집을 떠난 지 이십 분 후, 캐롤송의 같은 부분을 흥얼거리며 길을 걷던 두 남녀가 가게 앞에서 마주쳤다. 하루 만의 재회였지만 두 사람의 눈동자에는 그 동안의 그리움과, 커진 사랑 같은 감정의 단편들이 메아리쳤다. 그리고 이어진 가벼운 포옹.
 그들에게도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수정은 좁은 자취방 안을 크리스마스 장식과 각종 전구들을 이용해 화려하게 꾸몄다. 기민한 손놀림에 바닥에 떨어져 있던 볼트 하나하나, 작은 전구 하나하나가 모여 행복한 빛을 내렸다. 아직은 이른 저녁, 수정의 자취방 안은 행복에 이르는 빛으로 물들어갔다. 
 희주는 일부러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남자친구의 집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녀의 손에는 직접 만든 생크림 케이크가 선물 상자마냥 아담한 사이즈로 들려 있었다. 그녀는 모양이 흐트러질까 작은 박스를 조심조심 옆구리에 끼고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자 아파트의 좁은 창문 사이로 비오듯 질척질척 내리던 가루눈들이 함박눈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녀의 힐 소리가 또각또각 복도 안을 울렸다. 왜인지 엘리베이터가 조금 늦게 도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그녀의 작은 행복과 더불어 간직된 기대감 때문일까? 그런 작은 기대감이 그 꼬리를 양탄자처럼 길게 늘어뜨릴 무렵,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Ven hacia mi, descubre el amor

 Ven hacia mi, siente mi pasion

 Tu, ven hacia mi como el escorpion

 Que endulza con su herida

 Hay besos de mi que nadie robo

 Hay versos en mi que nadie escucho

 Tu, ven hacia mi con el corazon

 Que en mi se clavaria

 No mires atras ningun dia

 Atrevete a dar corazon

 I love you, mi vida

 I love you, My Life
 엘리베이터 바닥에 눈을 바탕으로 찍힌 사람들의 까만 발자국들 위로 작게 프린팅된 예쁜 용지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크리스마스에 걸맞는 캐롤 장식으로 꾸며진 용지 위에는 그와 그녀가 처음으로 함께 들었던 구 스페인의 노래가 프린팅되어 있었다.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노래 가사를 음미했다.

 내게로 와 줘. 사랑을 발견해 봐.
 
내게로 와. 나의 열정을 느낄 수 있도록.
 
너, 전갈처럼 내게로 와 줘. 
 
상처를 달콤하게 만들어 버리는.

 내게는 아무도 훔치지 못한 입맞춤이 있어.
 
내게는 아무도 듣지 못한 노래가 있어.
 
너, 내게로 와 줘. 진심으로.
 
내게 못처럼 박혀버릴 테니까.

 언제든 뒤를 돌아 보지 말아줘.
 
마음을 줄 수 있는 용기를 가져봐.

 너를 사랑해. 나의 연인이여.

 사랑해. 나의 삶과 같은 이여.
 그녀는 진심으로 기쁨을 느꼈다. 자신을 생각해 주는 그의 찬란한 사랑이 그녀의 온 몸을 녹여 버리는 것 같았다. 티끌 같은 잡념 하나 없는 순수한 사랑의 기쁨, 모든 것을 맡겨버릴 수 있는 편안한 감각이 그녀를 들뜨게 했다. 그녀는 걸음을 서둘렀다. 새하얀 함박눈이 그녀의 부드러운 물결처럼 출렁이는 머리카락 위에 내려앉았다. 오늘은 그야말로.......
 거룩한 밤. 고요한 밤.

 경민은 그가 자주 들르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오늘은 12월 25일. 모든 연인들에게 축복이, 태어난 새 생명에게는 거룩한 빛이 깃드는 날이다. 그런 감격스러운 날에 그는 구질구질한 기분으로 게임 리뷰를 천천히 읽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불러내고 싶은 그녀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그들 사이에는 요원한 일이었다. 바깥엔 하얀 눈발이 날리고 강아지들의 들뜬 짖음이 오늘만큼은 시끄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에게도 아직 희망의 빛은 남아 있는 게 아닐까. 소극적이지만 간절한 바램으로 그는 그녀에게 크리스마스 축하 문자를 보낼 마음으로 기판을 두드렸다. 
 .......
 하지만 기판을 작성하던 그의 손이 문득 멈췄다. 위이잉 소리와 함께 도착한 문자가 그의 문자 작성을 방해했던 것이다. 한 꺼풀 식은 열정과 조금 줄어든 희망을 느끼며 그는 온 문자를 확인했다. 친구들 모두에겐 그들에게 맞는 애인이 있었고, 그들은 모두들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그런데 어떤 문자가 온 것일까. 약간이지만 타오르는 오기를 발팜 삼아, 그는 크리스마스 문자를 꼭 보내기로 다짐하고 핸드폰의 사각 액정에 떨리는 시선을 고정했다.
 [경민아. 뭐해?]
 경민은 그 순간, 일종의 두려운 감정까지 가질 정도로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세상의 모든 행복, 이 축복받은 날에 내린 모든 행복을 그가 휩쓸어 버려도 괜찮은 것인지에 대해서. 그는 기쁜 감정에 자꾸 꼬이는 손가락을 느끼면서도 문자를 빠르게 완성하고 OK버튼을 눌렀다.
 [그냥 있어 -ㅠ-/]
 [심심하다.]
 [나도.]
 [ㅇㅇ...]
 경민은 그녀의 힘없는 문자에 어찌해야 할지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이래저래 잡생각이 많이 들었지만 그의 머릿속엔 그녀를 기쁘게 해 주고 싶다는 본능에 가까운 감정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는 과거에 매우 소극적인 성격이었지만 이제는 많이 변해가고 있었다. 보다 적극적이고, 분명함을 추구하는 새로운 길을 향해 한 발자국씩 걸음을 떼어놓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에게 주어진 훌륭한 기회가 될 수 있다. 애써 잡생각을 물리친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떨리는 손가락으로 문자를 작성했다.
 [우리 만날까?]
 [그럴까? ㅇㅅㅇ]
 약간의 후회감, 그리고 두려움. 하지만 더 이상 이 미묘한 감정을 후회를 동반한 채 그의 마음에 남겨둘 순 없었다. 그는 통화를 시도했다. 잠깐의 통화연결음, 반가운 목소리와 이상하게 들리는 자신의 목소리, 그런 혼란스러운 감정에 짧은 통화를 마쳤다.
 그리고 이제 남은 것은, 씻고 옷 차려입고 바깥을 향해 걸어 나가는 일 뿐.
 모두에게 즐거운 나날과 앞으로의 축복이 약속되기를!

 오늘은 크리스마스, 연인들의 전야제이자 파티날이다! 


 
  
 

by Eibon | 2008/12/25 23:24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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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케르 at 2009/02/18 03:25
하지만 우린 연인이 없어.
넌 참 ㅄ같아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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